말씀 눅 5:17~26, 사람들이 침상을 메고 와서
날짜 2014년 11월 9일
1. 중풍병자
중풍(中風)이란 뇌의 혈관이 막히거나 터지는 질환입니다. 현대 의학용어로는
뇌졸중(腦卒中)이라고 합니다. 뇌졸중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뇌소동맥이 파열되는
뇌출혈이고, 둘째는 뇌의 동맥이 막히는 뇌경색(腦梗塞)입니다. 현대적 의미에서는 중풍이 반드시
신체의 마비나 언어장애 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고대의 경우 경미한 중풍은
중풍으로 분류되지가 못했습니다. 가벼운 중풍은 병으로 인식되지도 못했고, 단지 뭐가 좀 모자란
사람이거나 불편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중풍으로 인정되었던 중증 중풍은 혼수상태로 진행되거나, 혹여 깨어난다
해도 후유증으로 반신불수가 됩니다. 간혹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평생을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누가 먹여 주어야 먹고, 입혀주어야
입고, 씻겨주어야만 했습니다. 대소변도 스스로 할 수 없어 부끄러움을 참아내야 하는 것이 바로
중풍입니다. 현대에도 그렇지만 중풍은 반드시 간병인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질병입니다. 이로 인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의 노동력마저도
빼앗아갑니다. 그 때문에 중풍은 지독한 가난을 가져다주는 질병이었습니다.
지난 9월에 제가 근육통으로 2주 가까이 누워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통증이 너무
심해 순간순간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잘 누워만 있으면 통증도 없고
편하게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아주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여보! 물!”
“여보! 약!” “여보! 전화기!” 시키는 대로 뭐든 척척 나오는 겁니다. 아픈 게 좋을 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편했던 시간이 이틀도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부터 “여보!” 불러도 잘
대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문 앞에 와서는 “또 뭐?” 그러는 겁니다. 딱 두 글자로
된 아내의 대답에서 저는 많은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애들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돕지는 못할망정, 작작 좀 시켜대라.’ 제 귀에 환청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주지 못하는 제 자신이 민망하고
미안했습니다. 그 뒤로는 배고파도 알아서 차려 줄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렸습니다. 목이 말라도
밥상에 앉을 때까지 참았습니다. 전날 까지만 해도 제가 누운 침대가 임금님의 보좌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눈치를 보기 시작하니, 이건 감옥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아파서 꼼짝 못하던 저는 반 평
짜리 작은 침대에 갇혀 있었습니다.
오래 병석에 누웠던 것도 아닌데, 그와 같은 두 주간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오늘 본문을 마주
대하니 느낌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중풍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하나만 하려 해도 미안한 마음, 혹은 정죄 감으로 마음이 상하는 질병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그들의 팔과 다리는 감옥이요 창살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침대 위에서
하루 종일 천정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답답함, 무력, 권태, 굴욕, 의존, 고독, 수치, 절망, 좌절…… 이것들이 반 평짜리 감옥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감정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중풍병자의 삶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지금처럼 신경외과 의사도
없었고, 재활원이나 물리치료사도 없었습니다. 고대의 의술이라는 것이 대체로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기에 비과학적인 것이 많았습니다. 일례로 성 프란체스코가 말년에 눈병에
걸렸습니다. 눈병이 낫지 않자 수도원에서는 눈병을 고치겠다고 양쪽 눈 옆을 인두로
지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병의 근원을 막겠다는 것이었지만, 참으로 미련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당시 중풍병자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동정심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병자가
원하는 것은 동정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거리를 다니며 사람들과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것. 우리가 지금 당연히 하는 일, 누리는
일이 중풍병자에게는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한 달, 두 달..., 아니 일 년, 이 년을 계속 침대에만 누워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교우님들이라면 침대 위에서 무슨 생각을
하셨겠습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본문의 중풍병자도 처음에는 많이 원망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긴 시간은 그로 하여금 체념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지은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정죄감이 그를 짓눌렀습니다. ‘혹시 내가 무슨 잘못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뇌경색의 경우 간혹 시간이 흐르며 막힌 혈관이 저절로 열려 상태가 호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풍환자들의 기적과 같은 회복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져 실낱같은 희망을
남겨주곤 했습니다. ‘희망’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고, 시련의 파도를 넘어서게 해주는
말입니다. 욕심과 시기와 질투를 세상에 출몰시킨 판도라의 상자에 남아있던 한 줄기 빛이
희망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가지 연명케 해 주었던 힘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희망은 이들에게 짐이 되었습니다. ‘누구는 다 나았다던데…….’
‘누구는 일도 시작했다던데…….’ 그러한 희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간절한 것이
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러한 희망은 오히려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넌 도대체 왜 낫지 않는 거야?’ ‘도대체 언제까지 누워만 있을 거야?’ 차라리
그렇게 말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다른 병과는 달리 10년, 20년이 넘어가는 긴 투병기간은
이들의 마음마저도 병들게 하였습니다. 아픈 게 죄가 되는 병이 바로 중풍이었습니다. 정죄
감, 이것이 꼼짝 못하는 그들의 몸보다 더욱 저들의 마음을 옥죄었습니다.
2. 사람들이 침상을 메고 와서
중풍에 걸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소외된 삶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에게
중풍이 찾아오기 전에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풍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 놓았습니다. 그에게 남은 사람들이란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와주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어찌보면 그것은 수많은 친구들
중에서 옥석을 가리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18절은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왔다고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는 그 사람들의
숫자가 네 명이었다고 알려줍니다. 중풍에 걸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친구를 변함없이 찾아오는
친구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친구들이 놀라운 소식을 갖고 친구를 찾아왔습니다. 열병과 나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가 하면, 심지어 파도까지 잠잠케 한다는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자신의 마을에 도착한 것입니다. 네 명의 친구들은 중풍병자가 누워있던 침상의 네
귀퉁이를 잡고 소문의 주인공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고 계신 그 집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입구로 다가갈
수도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이쯤에서 포기하거나, 혹시 인내심이 좀 더 있다면 집
밖에서 혹시 예수님께서 나오실 때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조금 별났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성경을 보면 꼭 동화책과 같은 기가 막힌 장면이 등장할 때가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그의 침상을 지붕 위로 올렸습니다. 이곳까지 침상채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지붕위로까지 올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지붕 위 예수님께서 계신
쪽 기와를 벗겨내기 시작했습니다. 천정에 장정들이 올라 기와를 벗겨내니 집 안에는 먼지가
날리고 삐걱 소리가 납니다. 말씀을 듣는 중 집 안팎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멀쩡한 지붕을 헐어내는 친구들을 향해 그만두라고 소리칩니다. 지붕의 구멍은 점점
커지고 집 안으로 강렬한 태양빛이 스며들었습니다. 집 안은 온통 먼지로 뒤덥혔고, 실내에 있던
사람들은 연신 기침과 재체기를 했습니다. 지금 말씀전하는 시간에 천정이 뚫리고 있다고 상상을
하시면 이해가 빠르실 것입니다. 천정에 금이 가더니만 구멍이 생기고 점점 큰 구멍이 되면서 그
가운데로 침상 하나가 둥실둥실 내려왔습니다. 집 안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 침상을 받아
내렸습니다.
침상이 예수님 앞에 놓였습니다. 지붕의 큰 구멍 위에서 친구들이 소리칩니다.
“예수님, 소란을 일으켜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친구입니다. 오랫동안 중풍을 앓고 있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제발 친구의 병을 고쳐주십시오.” 친구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지붕 위에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오늘 본문 20절 상반절에는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의 모습 속에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친구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뜨거운 햇살에 벌겋게 익은 얼굴에는 구슬땀이 맺혀있습니다. 중풍에 걸린 친구를
살리기 위해 온통 땀과 먼지로 범벅된 더러워진 얼굴이었습니다. 지붕에 오르고 기와를 걷어내기
위해 긁히고 찢긴 손과 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초롱초롱한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하고도 간절한 기대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마음이
아니었더라면, 지붕 위로 올라가거나 거기에 구멍을 낼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허무맹랑한 행동 이면에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를
위하여 자신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내던진 모습,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향했던 이들의 지치고 더러워진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20절과 2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중풍환자가 일어섰습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에 대한
말씀은 많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반평생을 반 평짜리 감옥에서 정죄감에 시달렸던
중풍병자에게는 해방의 선언이었습니다. 구원의 선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치료하십니다. 구원하십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의 아물지 않은
상처와 눈물까지도 모두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친구들이 침상을 옮기기 전에, 혹은 지붕을 뚫기
전에 고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굳이
수고스럽게 침상을 나르게 하시고, 지붕을 뚫게 하셨습니다. 친구들, 사람들의 손을
빌리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로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사람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가장 가까이 우리의 부모와
가족, 그리고 교우들과 친구들과 이웃들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더불어
주님께로 나아오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우리 주변의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주님께로
이끌어 갑니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고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땅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는 삶으로 이끌어 갑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많은 좋은
친구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항상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묻고, 때때로 시간과 여유가
될 때, 함께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하며 환담하는 분들이 많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에서
정말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십년 이상을 침상에 누워만 있을 때, 나를 찾아오고 나에게 말을
걸어줄 사람은 얼마나 되십니까? 나의 어려움을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께로 이끌어 줄
친구는 몇이나 되십니까? 그런 친구가 교우님들 곁에 계십니까?
3. 오늘
본문 26절 후반절에서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본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우리가 계속해서 보고 있는
누가복음에서 ‘오늘’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오늘’ 일어납니다. 영어로 현재를 ‘present’라고 합니다. 이것은 동시에 ‘선물’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을 ‘선물’로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설교 전에 함께 인사를
나누었던 주위의 교우들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오늘 교우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요, 은혜의 통로입니다.
많은 신앙인들 조차 교회와 공동체를 스스로 선택하고 골랐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기호와 의지에 따라 교회에 출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서로
함께 만나고, 이 자리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해외의 한인교회다보니 우리 교회는 오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지만, 어떤
사람들은 떠날 사람입니다. 저희 교회에는 그러신 분들이 안 계시겠지만, 간혹 이민교회에서는
떠날 사람과 남을 사람을 구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남고 누가 떠나는
것입니까? 사람의 길과 운명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한 목사님께서 강남의 교회에서 시무를 하셨는데, 사택은 강북에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20년
전, 10월 21일 새벽에 기도회에 가시면서 일찍 일어나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셨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기도회를 마치고 사무실에 잠시 들러 집으로 가려고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늘 다니던 길이 이상하게 모두 막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라디오를
틀었습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습니다. 사무실에서 조금만 더 일찍 출발하였더라면, 어쩌면
성수대교 아래에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집에서
나오시며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목사님이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우리로서는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도 있습니다. 일과 직장이 우리의 삶의 터전을 옮겨놓기도
합니다. 이곳에 먼저 왔다고 먼저 가는 것도 아니며, 떠날 기약이 있는 사람보다 때로는 먼저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떠나도 떠난 곳에서 다시 만날지도 모릅니다. 떠났던 사람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한소망교회 페이스북 페이지에 한국에서 최 집사님과 양 집사님 만난
사진이 올라왔습니다. 모두 떠났으나 이들의 관계는, 또한 교우님들과의 관계는 지속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를 하셨던 홍인종 교수님은 정신여고 교장이셨고, 여전도회 전국연합회를 이끈
이연옥 권사님의 조카입니다. 이연옥 권사님의 남편이 영암교회 담임목사님이셨던 임옥
목사님이시다. 1988년 11월 25일 한국교회와 스위스교회가 자매교단으로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
때 예장 통합교단의 총회장으로 협정서에 서명을 하신 분이 바로 고 임옥 목사님이셨습니다. 이
협정으로 우리 두 교회가 도움을 받아 유지되어 왔고, 오늘 제가 부임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임옥
목사님께서 협정에 서명하실 때,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당신의 조카가 목사이자 교수가 되어
당신께서 서명하신 것으로 인하여 도움을 받은 교회에 설교를 하러 올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헤어지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아니 영원히 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만남이 잠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교제할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구원도 영생도 생명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부임을 할 때에 많은 분들이 이 자리가 임기제 임을 각인시켜 주셨습니다. 6년 후에
반드시 떠날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미련을 갖거나 지체하려 하면, 교회가 힘들어질 것이라 충고를
해주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그 임기를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그게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채 1년도 되지 않아 사역을 배우고, 교우들과 알아가는
단계에서 저는 벌써 이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단 그것이 저 뿐만이 아님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제 머리 속에서 6년의 임기를 지우기로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주신 만큼 있을 것입니다. 주어진 여건과 계약 등을 무시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루가 되었든 6년이 되었든, 한국으로 부르시든 하늘로 부르시든, 부르시는 날까지 하루하루를
똑같이 살 것입니다. 영원히 이곳에 뼈를 묻고 살 사람처럼 살며 목회를 하겠다는
말입니다. 아이제나흐의 루터하우스에 가면, 그 앞에 루터의 말이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대다수의 독일 사람들은 이것이 스피노자보다 전 세대
사람이었던 루터의 말로 알고 있습니다.
내일이 지구의 종말이라면 사과나무를 심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이 우리의 삶을 주장하신다면, 우리는 어제와 동일한 오늘, 변함없고, 요동함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저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모두
나그네입니다. 각자의 인생의 여행길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곳 스위스에서 한 가족 한 공동체로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이곳에서 함께 하는 오늘 이
시간, 진실한 관계,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십시다. 주님께로 인도하는 그런 사귐을
가지십시다. 편당을 짓고, 우리끼리만 친한 사람들 되지 마십시다. 사랑하고만 살아도 모자라고
아까운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가족입니다. 한 교우가 아프면 모두가 아픈 것이 옳은
것입니다. 한 교우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손가락 떨어져 나간 것처럼 고통스러워야 바른
것입니다. 한 교우의 큰 기쁨이 우리 모두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마치기 전에 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시를 한 편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는 시 일
것입니다.
그대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
만릿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고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려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우리의 공동체, 우리의 교회가 그 사람을 만나는 바로 그 곳으로 만들어 가십시다. 서로서로
주님께로 이끌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보내신 우리의 교우들로
인하여 ‘오늘’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누리는 교우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김명환 목사